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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눈에 보는 아일랜드 역사

by Kieran_Han 2014. 6. 6.


Celts(켈트) & Viking(바이킹)


BC 300년쯤에 유럽 본토에서 Ireland로 건너오기 시작한 Celts(켈트족) 전사들은 BC 100년경 정착한 듯하다. AD 5세기경에 기독교 수도사들이 들어왔는데, 그 가운데 St. Patrick(성 패트릭)도 있었다. 암흑시대가 중세 유럽을 뒤덮으면서, Ireland는 유럽 문명의 전초기지가 되었다. 성자, 학자, 선교사가 넘치고, 많은 수도원들이 아름다운 채색 필사본을 만들었다. 8세기 말 이후 Viking이 Ireland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국 Viking은 전설적인 Celts 영웅인 Brian Boru(먼스터의 왕 브라이언 보루)에게 1014년 패하고 만다.


Brian Boru - 먼스터의 왕 브라이언 보루



영국의 도래


1169년 England를 정복한 Normand Dynasty(노르만 왕조)의 영향력을 Ireland에까지 뻗친다. Henry II of England(헨리 2세)는 Ireland 왕국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군사를 보냈다. 그 중에는 Ireland 정복의 역사를 연 Richard FitzGilbert 2nd earl of Pembroke(펨브룩, 일명 스트롱보우 Richard Strongbow)도 있었다. 그러나 Viking이 Ireland를 침략하고 나서 정착하고 동화되었듯이 앵글로 노르만 침입자들도 같은 전철을 밟았다.


Norman Dynasty 이래 현재까지 사용되는 England의 문장


1500년대 청교도인 Henry VIII of England(헨리 8세)가 다시 Ireland로 진격했으나, Ireland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사람은 그의 딸이자 왕위 계승자인 Elizabeth I of England(엘리자베스 1세)였다. Elizabeth I of England 치하에서 Ireland 가톨릭교도들은 심한 박해를 당했다. 정복자들은 이들에게 몰수한 엄청난 면적의 땅을 신교이주민에게 넘겨 오늘날 Ireland 분단의 씨앗을 뿌렸다.


Elizabeth I of England (엘리자베스 1세)


1641년 Ulster(얼스터)에서 구교도들의 저항운동이 일어나 신교 정착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1640년대 후반 England에서 English Civil War(청교도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Oliver Cromwell(올리버 크롬웰)이 1649년 2년간의 폭정을 시작하면서 Ireland 구교도를 진압하기 위해 가는 곳마다 피를 뿌렸다.


Oliver Cromwell (올리버 크롬웰)


1685년 James II of Scotland(스코틀랜드인 제임스 2세)가 즉위했으나, 노골적으로 구교를 옹호하는 바람에 신교도들의 분노를 사서 도피해야만 했다. James II of Scotland은 Ireland에서 군사를 모집하여 당시 신교도인 Willem III van Oranje(오랑예 반 빌름 3세)과 그의 아내 Mary II of England(메리, 제임스의 딸)에게 양도됐던 왕위를 탈환하려고 했다. 그러나 결국은 1690년 7월 12일 Battle of the Boyne(보인강 전투)에서 Willem III van Oranje가 Ireland-France 연합군에 승리한 것을 계기로 신교가 득세한다. 신교도들은 이 날을 '교황과 천주교'에 대한 승리로 오늘날까지도 기념하고 있다.


Battle of the Boyne (보인강 전투)


18세기 초 Ireland 구교도들은 전체 토지의 15%도 안 되는 땅을 소유했으며, 취업, 교육, 토지 소유, 종교 면에서 혹독한 규제를 당했다. Belfast(벨파스트) 장로교인들이 United Irishmen(아일랜드인 협회)을 조직하여 Ireland 민권운동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이 단체는 교파를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을 결집함으로써 Ireland에서 England 권력을 축소시키겠다는 높은 이상을 갖고 출발했다. 그러나 이 단체는 지도자인 T.Wolfe Tone(울프 톤, 1763-1798년)이 영국군에게 체포돼 결국에는 자살하면서 실패하고 만다. 이들의 이상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Ireland 민족주의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Ireland의 프로테스탄트 젠트리 계급(귀족 다음 계급)은 소요가 확산되는 데 불안을 느끼고 England와의 결탁을 한층 강화해 안전을 도모했다. 1800년 Act of Union(통합법)이 통과되면서 Ireland는 정치적으로 England에 합병됏다.


Irish Reblellion (1978.05.24 ~ 1978.09.24)


19세기 전반에는 Daniel O'Connell(다니엘 오코넬, 1775-1847년)이 등장, 평화적 수단으로 Ireland 독립을 추진해 나가기 시작했다. Daniel O'Connell은 1828년 England 의회에 의석을 얻었고, 1829년 England 의회는 가톨릭교도 해방법을 제정하여 제한된 범위나마 가톨릭교도에게 선거권과 의회 입후보권을 부여했다. 이처럼 위대한 승리를 거둔 후 지속적인 개혁 작업에 매진하던 Daniel O'Connell은 Ireland가 최대의 비극을 겪는 시점에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Daniel O'Connell


재배하기 쉬운 감자가 남미에서 도입되어, 당시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던 가난한 Ireland 민중의 주식이 되었다. 1845년부터 1851년까지 계속된 가뭄으로 감자 농사가 흉작을 거듭하자. 'Great Famine - Ireland(아일랜드 대기근)'으로 알려진 대규모 기아와 이민 사태가 발생했다. 그 후 100년 동안 Ireland 인구는 감소일로를 걸었다.



Great Famine으로 인해 이민가려는 사람들이 붐빈 항구의 모습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England 의회는 Ireland에 자치를 허용하는 방안을 숙고하기 시작했으나,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함에 따라 보류됐다. Ireland는 느리지만 편화적인 방법으로 화합을 향하여 나갈 수도 있었지만, 불행히도 1916년 어설픈 봉기가 일어나고 말았다. 지금은 소위 'Easter Rising(부활절 봉기)'라고 하여 현재는 자유를 향한 영광스러운 항쟁으로 기리고 있으나, 이 사건은 구호만 가득하고 서투르며 대중의 지지도 약했던 봉기였다. England의 대응 역시 한심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봉기가 진압되자 재판과 처형(총15명)이 이어졌던 것이다. 이런 England의 대처에 반란 주모자들은 순교자로 승격되었고, Ireland 독립에 대한 국제적 지지를 일깨웠다.


1922년 Easter Rising 6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이다.



독립으로 가는 길


1918년 총선에서 Ireland 공화파는 Sinn Fein('우리 스스로', '우리만이'라는 뜻)이라는 구호 아래 Ireland 의석 과반수를 차지했다. Easter Rising 가담자였던 이들은 England 의회 참석을 거부하고 Ireland 독립을 선포했으며, Eamon de Valera(1882.10.14-1975.08.29, 에몬 데 벌레라)가 이끄는 최초의 Ireland 의회 'Dail Eireann(다일 에이렌)'을 구성했다. 그러나 England는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대결은 불가피했다. Irish War of Independence(Or Anglo-Irish War, 1919-1921년)로 Sinn Fein과 산하 군대인 IRA(Ireland 공화국군)는 England에 맞섰다. 반영 감정이 확산됐고, 잔학행위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바로 이 시기에 Micheal Collins(1890.10.16-1922.09.22, 마이클 콜린스)라는 인물이 전면에 등장한다. 카리스마가 넘치고 무자비한 지도자였던 그는 IRA의 대영국 폭력 저항 운동을 주도했다.


Irish War of Independence에 참전한 IRA


수개월간 협상 끝네 1921년 12월 06일, Micheal Collins와 Arthur Griffith(1872.03.31-1922.08.12, 아서 그리피스) Anglo-Irish Treaty(영국-아일랜드 조약)에 서명한다. 이 조약으로 1922년 Ireland 26개 카운티(현재의 아일랜드)가 독립했고, Ulster 내 신교도가 대다수인 6개 카운티(북아일랜드)는 독립을 거부할 권리를 얻었다. 그러나 England 국왕에게 충성을 서약해야 하는 Anglo-Irish Treaty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de Valera와 가톨릭교도들은 Irish Civil War(아일랜드 내전)를 일으켰고, Micheal Collins가 조약 반대파에게 암살당했다. 1923년에 이르러 내전이 소강 상태에 접어들면서, 근 50년간 Ireland 공화국은 느리면서도 비교적 평화롭게 발전했다. 수년 간 Dail Eireann을 보이콧하던 de Velera는 Fianna Fail('아일랜드 전사들'을 뜻함)이라는 신당을 창당하여 1932년 선거에서 다수당이 됐다. de Velera는 1937년 헌법을 개정하여 England 충성 서약을 폐지하고 Ulster 6개 캐운티에 대한 주권을 요구했다. 1948년 Ireland 정부는 Ireland를 공화국으로 선포하고 1949년에 England로부터 벗어났다.


Eamon de Velera



Northern Ireland 분쟁


북부 6개 카운티는 1920년부터 1972년까지 Belfast 부근 Stormont(토몬트)에 자리한 Northern Ireland 의회의 관할 아래 있었다. 신교 다수당은 가톨릭교도들을 권력에서 조직적으로 배제함으로써 지배권을 확실히 다졌다. Northern Ireland 가톨릭교도들은 처음에는 공정한 대표권을 쟁취하기 위해 교파를 초월하여 민권운동을 벌였다. 1969년 1월 민권운동 시위대가 취업과 주택공급의 평등을 요구하며 Belfast에서 Derry(데리)까지 행진을 벌이기 시작했다. 신교도와 충돌하고 폭력사태가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결국 1969년 8월 England군이 사태를 진압하러왔다. 처음에 England군을 환영하던 가톨릭교도들은 곧 이들을 신교 다수파의 앞잡이로 보기 시작했고 그동안 칩거하고 있던 IRA의 활동으로 사태가 격화됐다.


UVF 로고


이렇게 해서 이른바 'Northern Ireland 분쟁'은 1970년대 내내 그리고 80년대까지도 혼선을 거듭했따. 1972년 '피의 일요일(1월30일)'에 England군이 Derry에서 비무장 상태의 가톨릭교도 13명을 사살하자 분노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1981년 Northern Ireland지역 IRA 포로들은 테러범이 아니라 정치범으로 대우해 줄 것을 요구하며 단식 투쟁에 들어갔다. IRA가 '공식파'와 '잠정파'로 갈라지면서 한층 더 폭력적인 공화파 단체가 생겨나는 등, 투쟁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으로 변했다. IRA에 대항하여 신교도에도 UVF(Ulster Volunteer Force) 같은 준군사조직이 생기는 등 폭력의 악순환이 계속됐다.



평화의 기회


Anglo-Irish Treaty에 의해 1985년 Dublin 정부는 처음으로 Northern Ireland 문제에 대해 공식 자문 역할을 맡았다. 1993년 12월 England와 Ireland 공화국이 'Downing Street Declaration(다우닝가 선언)'에 서명하면서 평화에 한걸음 다가섰다. Ireland의 분단 상태는 변함이 없지만, 영국은 더 이상'이기적인 경제적, 군사적 이해'를 추구하지 않겠다고 선포한 것이다.


Downing Street Declaration에서 악수하고있는

Prime Miniter of the United Kingdom, John Major와 Taoiseach of the Republic of Ireland, Albert Reynolds


1994년 8월 Sinn Fein 당수인 Gerry Adams(제리 아담스)가 IRA의 '영구적 폭력 사용 종식'을 공표하면서 Ulster에는 거의 상상도 못했던 평화의 조짐이 나타났다. 신교 준군사 조직들도 이에 응하여 1994년 10월 휴전을 선언했다.


 1995년 United Kingdom 정부와 Ireland 정부는 초당파적 평화회담을 개최하기 위한 사전작업으로 두 가지 문서를 공표했다. 그러나 보수파인 Prime Miniter of the United Kingdom, John Major가 초당파 회담을 열기 위해 IRA 무장해제를 선결조건으로 내세우면서 후속 협상은 제자리 걸음을 하게 된다. 1996년 2월 London Docklands에서 IRA 폭탄 테러가 발생하면서 협상은 결렬됐다. 1996년 6월 IRA가 휴전협정을 지킬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하자, Ulster의 미래에 관한 초당파적 회담은 Sinn Fein당이 불참한 가운데 열렸다.


1996.02.18 London Docklands에서 IRA의 폭탄테러


평화를 향한 전진은 1997년 5월 Tony Blair(토니 블레어)의 노동당이 압승하면서 그 추진력을 회복했다. 거대 여당이 된 노동당은 이전의 보수당 정부보다 훨씬 더 큰 재량권을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97년 6월 United of Kingdom의 신임 Northern Ireland 장관 Mo Mowlam(1949.09.18-2005.08.19, 모 몰램) Sinn Fein이 새로이 휴전을 선언하기만 하면 초당파 회담에 동참시키겠다고 공약했다. 이에 고무된 IRA는 1997년 7월 다시 휴전을 선언했다.


회담 결과 1998년 4월 10일 'Belfast Agreement(Good Friday Agreement)'이 체결됐다. 이 복잡한 협약에 따라 Northern Ireland 주민은 다수결 원칙으로 자신들의 정치적 장래를 결정하고,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수단으로 정치문제에 대한 견해차를 해소하는 데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이렇게 하여 Northern Ireland 의회가 탄생했으며, 공화국과 Northern Ireland 간에 고위급 정치 연계가 이루어졌다. 1998년 5월 Ireland 국격 양편에서 동시에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유권자의 71%가 이 협약에 찬성표를 던졌다. 그러나 평화를 향한 이러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그 해말 '진정한 IRA'를 자처하는 자들이 오마에 폭탄을 설치하여 28명이 목숨을 잃었다.


Belfast Agreement 로고


이후 IRA는 비축한 무기 중 일부를 자진 폐기했다. 그러나 IRA가 스파이 행위에 연루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된 후 2002년 10월, 권한 이양은 다시 연기되었다. IRA가 더 많은 무기를 폐기함으로써 평화적 해결에 다가섰지만, 2003년 11월에 치러진 선거는 추가적인 협상이 진행될 것임을 보여주지 못했다. 신뢰의 부족으로 인해 협상이 결렬되면서 영구적인 평화 협정을 목전에 두고 2004년이 지나가 버렸다. 2004년 12월에 발생한 2,650만 파운드 규모의 은행 강도 사건과 2005년 1월에 벌어진 살인 사건의 배후로 IRA가 지목되면서 많은 이들은 평화를 향한 IRA의 의지에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2005년 7월 28일, 돌연 IRA는 무장 투쟁을 공식적으로 중단하겠다는 빅뉴스를 내놓았다. 2개월 후 독립적인 무장 해제 담당 기구의 조사를 통해 IRA가 실제로 모든 무기를 폐기했음이 확인되었다.


28th July, 2005 무장 투쟁을 중단하겠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있는 IRA


현재는 신중한 낙관론이 힘을 얻고 있으며, 오랜 시간을 끌어온 증오와 이다금씩 발발하는 사건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침내 전쟁이 끝났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