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하나/[ TEXT ]

경희 - 나혜석

by Kieran_Han 2020. 12. 22.

경희의 앞에는 지금 두 길이 있다.

그 길은 희미하지도 않고 또렷한 두 길이다.

한 길은 쌀이 곳간에 쌓이고 돈이 많고 귀염도 받고 사랑도 받고 밟기도 쉬운 황토요, 가기도 쉽고 찾기도 어렵지 않은 탄탄대로이다.

그러나 한 길에는 제 팔이 아프도록 보리 방아를 찧어야 겨우 얻어먹게 되고 종일 땀을 흘리고 남의 일을 해 주어야 겨우 몇 푼 돈이라도 얻어 보게 된다.

이르는 곳마다 천대뿐이요, 사랑의 맛은 꿈에도 맛보지 못할 터이다.

발부리에서 피가 흐르도록 험한 둘을 밟아야 한다.

그 길을 뚝 떨어지는 절벽도 있고 날카로운 산정(山頂)도 있다.

물도 건너야 하고 언덕도 넘어야 하고 수없이 꼬부라진 길이요, 갈수록 험하고 찾기 어려운 길이다.

경희의 앞에 있는 이 두 길 중에 하나를 오늘 택해야만 하고 지금 꼭 정해야 한다.

오늘 택한 이상에는 내일 바꿀 수 없다.

지금 정한 마음이 이따가 급변할 리도 만무하다.

아아, 경희의 발은 이 두 길 중에 어느 길에 내놓아야 할까.

이것은 교사가 가르칠 것도 아니고 친구가 있어서 충고한대도 쓸데없다.

경희 제 몸이 저 갈 길을 택해야만 그것이 오래 유지할 것이고 제정신으로 한 것이라야 변경이 없을 터이다.

 

경희도 여자다. 더구나 조선 사회에서 살아온 여자다.

조선 가정의 인습에 파묻힌 여자다.

여자란 온량유순해야만 쓴다는 사회의 면목이고 여자의 생명은 삼종지도(三從之道)라는 가정의 교육이다.

일어서려면 압박하려는 주위(周圍)요, 움직이면 사방에서 들어오는 욕이다.

다정하게, 손 붙잡고 충고 주는 동무의 말은 열 사람 한 입같이 "편하게 전과 같이 살다가 죽읍시다." 함이다. 경희의 눈으로는 비단옷도 보고 경희의 입으로는 약식 전골도 먹었다.

아아 경희는 어느 길을 택하여야 당연하가?

어떻게 살아야만 좋은가?

'하나 > [ TEXT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꿈과근심 - 한용운  (0) 2020.12.29
위대한 개츠비 - Francis Scott Key Fitzgerald  (0) 2020.12.29
이[彛]와 개에 관한 명상 - 이규보  (0) 2020.12.22
한 스푼의 시간 - 구병모  (0) 2020.12.22
Everyman - Philip Milton Roth  (0) 2020.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