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추샤가 방에 들어오거나 그녀의 하얀 에이프런이 멀리서 보이기만 해도 네플류도프는 모든 것이 햇빛이 내리비추는 것처럼 황홀해 보였고, 모든 일이 전보다도 한층 즐겁고 재미있게 느껴지고 인생 자체가 보다 의미 있고 행복하게 여겨졌다. 그녀도 역시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네플류도프에게 이런 기분을 일으키게 한 것은, 카추샤가 눈앞에 있거나 가까이에 있을 때만이 아니었다. 그저 카추샤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의식만으로도, 또한 그녀 역시 네플류도프가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만 해도, 두사람은 행복했다. 네플류도프는 어머니로부터 불쾌한 편지를 받거나, 논문이 잘 되지 않거나, 또한 청년에게 흔히 있는 이유 없는 우수를 느끼거나 할 때에도 그저 카추샤가 가까이에 있고 언제든지 그녀를 볼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그러한 모든 근심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카추샤에게는 집안 일이 무척 많았지만 그녀는 모든 일을 척척 해치우고 나서 틈이 나는 대로 책을 읽고 있었다. 네플류도프는 자기가 다 읽고 나면 곧 그녀에게 도스토예프스키나 추르게네프의 소설을 빌려 주었다. 그 중에서도 그녀는 투르게네프의 <<정적>>을 좋아했다. 그들 사이의 대화는 복도나 발코니나 뜰에서 우연히 부딪혔을 대를 이용하여 잠시 동안 조급하게 주고받는 것이 고작이었다. 대로는 카추샤와 함께 자는 고모의 늙은 하녀 마트료나 파블로브나의 방에서 얘기할 때도 있었다. 네플류도프는 가끔 그 방으로 가서 사탕이나 차를 대접받았다. 그런데 마트료나 파블로브나 앞에서 주고받는 대화는 그지없이 즐거웠지마느, 단둘이 마주보고 앉아 이야기 할 때는 어쩐지 어색했다. 이윽고 눈과 눈이 서로 마주칠 때마다 둘은 이심전심이 되기 시작했다. 입이 이상하게 떼어지지 않아 어쩐지 까닭을 알 수 없는 쑥스러움 때문에 두 사람은 어색하게 헤어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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