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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대륙기 - 은림 아름다운 무늬로 상감된 파란 접시 위에 산 채로 회 떠진 생선을 물끄러미 본다. 차마 시선을 돌릴 수도 머물 수도 없는 산 머리가 입을 뻐끔댔다. 시퍼렇게 눈뜬 삶이 무화를 노려본다. 연회장에 차려진 식탁의 한가운데엔 식재료의 싱싱함을 자랑하는 살아 있는 물고기가 헤엄치는 크고 아름다운 어항이 놓여 있었다. 반공주는 그 안에 예정된 죽음을 기다리는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짙게 화장한 얼굴이 둥근 어항에 비쳐 기괴하게 일그러져 보였다. 누군가 무화를 이 비루한 삶에 잡아 넣고 종국에는 이렇게 굽거나 회쳐먹으리라. 그 식탁의 주인은 과연 누굴까. 무화는 생선 기름으로 씁쓸한 입술을 닦았다. 입 안에 씹어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는 살점이 굴러다녔다. 무화는 생선 기름으로 씁쓸한 입술을 닦았다. 입 안에 .. 2021. 9. 29.
역사의 역사 - 유시민 나는 역사가 문학이라거나 문학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훌륭한 역사는 문학이 될 수 있으며 위댛한 역사는 문학일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 에서 다룬 역사책들을 읽으면서 나는 흥미로운 역사의 사실을 아는 즐거움을 얻었고 사실들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기쁨을 누렸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귀하게 다가온 것은 저자들이 문장 갈피갈피에 담아 둔 감정이었다. 역사의 사시로가 논리적 해석에 덧입혀 둔 희망, 놀라움, 기쁨, 슬픔, 분노, 원망, 절망감 같은 인간적, 도덕적 감정이었다. 역사의 매력은 사실의 기록과 전승 그 자체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생각과 감정을 나누는 데 있음을 거듭 절감했다. 2021. 9. 29.
서로의 마음을 산책 중 - 자토 가끔은 귀찮음을 무릅쓰고 최선을 다해 꾸미고 싶은 날이 있다. 누군가에게 예쁘게 보이기 위해 열심이었던, 과거의 설렘들이 그리울 때 말이다. 2021. 9. 29.
건너편의 사람 - 박가람@seeinmymindd 건너편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다 여긴 초록 부링 사라진 횡단보도 모든차가 187로 달리는 여기서 누군가에게 건너가려면 목숨을 건 무단횡단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인간에게로 가는 길에는 이렇게도 시체가 많은 것이다 「사랑과 가장 먼 단어」 2021. 9. 29.
춘향전 - 작자미상 옛말에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다'고 하오니, 사또께서는 응당 아실지라. 만일 나라가 불행하여 어려운 때를 당하오면 사또께서는 도적에게 굴복하시리이까? 2021. 9. 29.
5월 아침 - 김영랑 비 개인 5월 아침 혼란스런 꾀꼬리 소리 찬엄(燦嚴)한 햇살 퍼져 오릅내다 이슬비 새벽을 적시울 즈음 두견의 가슴 찢는 소리 피어린 흐느낌 한 그릇 옛날 향훈(香薰)이 어찌 이 맘 홍근 안 젖었으리오마는 이 아침 새 빛에 하늘대는 어린 속잎들 저리 부드러웁고 발목은 포실거리어 접힌 마음 구긴 생각 이제 다 어루만져졌나보오 꾀꼬리는 다시 창공을 흔드오 자랑찬 새 하늘을 사치스레 만드오 사향(麝香) 냄새도 잊어버렸대서야 불혹이 자랑이 아니 되오 아침 꾀꼬리에 안 불리는 혼이야 새벽 두견이 못 잡는 마음이야 한낮이 정밀하단들 또 무얼하오 저 꾀꼬리 무던히 소년인가 보오 새벽 두견이야 오-랜 중년이고 내사 불혹을 자랑턴 사람. 2021. 9. 27.
이상적 부인 - 나혜석 연애결혼만 해도 처음은 여자에게 무엇이 있을 듯하여 호기심을 두던 것이 미구에 그 밑이 들여다보이고 여자는 그대로 말라붙고 남자는 부절히 사회 훈련을 받아 성장해 나가니 그 결과는 어떻게 되겠습니다. 서로 물끄러미 말끄러미 쳐다보게 되고 권태가 생기지요. 2021. 9. 27.
허생전 - 채만식 "악한 돈일랑 모으지 마시오. 인자는 불부라는 말이, 세상 사람이 돈을 악하게밖에는 모을 줄을 모르기 때문에 그래 난 말이지요. 악하지 않게 모아 악하지 않게 쓰면야 부자가 나뿔 며리야 없는 것이니깐요." 2021. 9. 27.
오늘의 명언 - Ἀριστοτέλης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거나, 혼자로도 충분하기 때문에 사회가 필요없는 자는 짐승이 아니면 신이 틀림없다 2021. 9. 27.
인연 - 한용운 정말 사랑하고 있는 사람 앞에서는 생각하고 있다는 말을 안합니다. 안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 사랑의 진리입니다. 잊어야겠다는 말은 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정말 잊고 싶을땐 잊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헤어질때 돌아보지 않는것은 너무 헤어지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것은 그 만큼 그 사람을 못 잊는 것이요 그 만큼 그 사람과 사랑했다는 것이요. 그러나 알 수 없는 표정은 이별의 시초이며 이별의 시달림입니다. 떠날때 울면 잊지 못하는 증거요. 가다가 달려오면 사랑하니 잡아달라는 것이요 가다가 멈추면 다시 한번 더 보고 싶다는 것이요 뛰다가 전봇대에 기대어 울면 오직 당신만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2021. 9. 27.
부활 - Лев Николаевич Толстой 고모네 집은 한적한 시골에 있었으므로 매우 조용했고, 그의 마음을 들뜨게 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게다가 고모들은 조카이면서 자기들의 상송작인 그에게 다정하게 대해 주었으며 그 역시 고모들을 사랑하고 그 고풍스럽고 소박한 생활을 좋아했었다. 네플류도프는 고모 집에서 지낸 그 해 여름에 환희에 찬 기막힌 경험을 했다. 그것은 청년이 처음으로 남의 가르침 없이 스스로 인생의 모든 아름다움과 그 의미를 인식하고, 인생에 있어서 자기에게 맡겨진 일의 가치를 깊이 깨닫고, 자기와 온 세계의 무한한 가능성을 찾아내고, 자기가 공상하고 있는 완성의 경지에 반드시 도달할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뿐만 아니라 완전한 확신까지도 믿으면서, 그 일에 몰두할 때 경험할 수 있는 그런 정신적 감격이었다. 그 해, 아직 대학.. 2021. 9. 24.
우리는 이별에 서툴러서 - 최은주 이별카페는 불이 환히 켜져 있었다. 카페 안으로 들어서자 사장님과 눈이 마주쳤다. "맞아요, 오늘 헤어지러 왔어요." 사장님은 다 안다는 듯한 눈빛을 주었다. 1인 테이블에는 먼저 온 여자 손님이 노트북을 펼치고 무언가 하고 있었다. 우리는 구석진 창가 자리로 갔다. 내가 안쪽 자리에 앉고 아버지는 바깥 자리에 앉았다. 이윽고 커피가 나오고 피할 수 없는 둘만의 시간이 되었다. 그냥 아버지와 같은 거로 시킨 아메리카노에서는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 잔이 모두 비워지면 그땐 헤어지게 된다. 마지막 순간이 되면 가슴이 더 주체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차분해지고 있다. 아버지는 미안하다고 하시겠지. 그럼 나는 괜찮다고 해야 할까. 그 말은 지금 괜찮다는 말이 될까. 앞으로 괜찮아질 거라는.. 2021. 9. 24.
웬델른 - 김현재 작은 동물은 아직 숨이 붙어 있었지만 몹시 약해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았다. 정수가 몸통을 쓰다듬자 한쪽 눈동자가 움직여 그와 눈길을 맞췄다. 정수는 눈을 감고 그 작은 동물의 머리 위에 조심스럽게 이마를 대었다. 한참 뒤 고개를 든 정수는 새끼들을 바라보았다. 어미 쪽을 보던 새끼들은 얼른 정수와 눈길을 마주했다. 정수는 옆쪽으로 좀 더 기어가서 양팔로 작은 동물과 새끼들을 품었다. 2021. 9. 24.
아주 사소한 히어로의 특별한 쓸쓸함 - 김인숙 지난번보다 조금은 더 커졌나.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이를 바라봤다. 적어도 아이가 지난번보다 조금 더 빠르게 걷는 건 분명했다. 그를 만나고 싶은 열망 때문이 아니라 그만큼 자랐다는 뜻이고, 그만큼 보폭이 커졌다는 뜻이었다. 자신의 성장 속도를 이기지 못해, 아이는 만나기가 귀찮고 성가신 아버지를 일 분쯤 더 빠르게 만나야 하는 것이다. 2021. 9. 24.
우리는 이별에 서툴러서 - 최은주 빛이 아니어도 된다. 지금과 다르기만 하면 된다. 쳇바퀴 밖으로 한 발 내디딜 수만 있으면 된다. 2021. 9.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