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하나421

경희 - 나혜석 경희의 앞에는 지금 두 길이 있다. 그 길은 희미하지도 않고 또렷한 두 길이다. 한 길은 쌀이 곳간에 쌓이고 돈이 많고 귀염도 받고 사랑도 받고 밟기도 쉬운 황토요, 가기도 쉽고 찾기도 어렵지 않은 탄탄대로이다. 그러나 한 길에는 제 팔이 아프도록 보리 방아를 찧어야 겨우 얻어먹게 되고 종일 땀을 흘리고 남의 일을 해 주어야 겨우 몇 푼 돈이라도 얻어 보게 된다. 이르는 곳마다 천대뿐이요, 사랑의 맛은 꿈에도 맛보지 못할 터이다. 발부리에서 피가 흐르도록 험한 둘을 밟아야 한다. 그 길을 뚝 떨어지는 절벽도 있고 날카로운 산정(山頂)도 있다. 물도 건너야 하고 언덕도 넘어야 하고 수없이 꼬부라진 길이요, 갈수록 험하고 찾기 어려운 길이다. 경희의 앞에 있는 이 두 길 중에 하나를 오늘 택해야만 하고 지금.. 2020. 12. 22.
이[彛]와 개에 관한 명상 - 이규보 한 손님이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엊저녁에 어떤 불쾌하게 생긴 남자가 큰 몽둥이로 떠돌이 개를 쳐죽이는 걸 봤는데, 너무나 불쌍하고 마음이 아프더군요. 그래서 앞으로 개고기나 돼지고기를 먹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대꾸했다. "어제 어떤 사람이 불이 이글이글한 화로 곁에 앉아서 이를 잡는 족족 태워죽이는 걸 봤는데, 마음이 아파 다시는 이를 잡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지요." 손님은 놀라며 이렇게 말했다. "이는 하찮은 벌레 아닙니까. 나는 덩치가 있는 큰 짐승이 죽는 걸 보고 불쌍해서 그렇게 말한 건데 당신은 이런 식으로 대꾸하다니, 나를 놀리는 게 아니오." 이 말을 듣고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무릇 생명이 있는 것은, 사람으로부터 소나 말, 돼지와 염소, 개미와 같은 곤충에 이.. 2020. 12. 22.
한 스푼의 시간 - 구병모 존재의 진실성 여부가 그것을 상상하는 살마들의 수긍과 인정에 달려 있는 것들. 잊어버린 채 방기하고 있으면 어느 순간 등 뒤에서 노크해 오거나 부지불식간에 덜미를 잡아채는 것들. 실체를 확인하고 분석하기 위해 과감히 렌즈를 들이대면 사라지는 것들. 그래서 때로 지나치게 의미가 부여되곤 하는 것들. 2020. 12. 22.
Everyman - Philip Milton Roth 거짓말은 정말 경멸스러운 방식으로 값싸게 다른 사람을 통제하려는 거야. 다른 사람이 불완전한 정보에 따라 행동하는 걸 지켜보는 거야. 다른 사람이 수모를 겪는 걸 지켜보는 거라고. 거짓말은 아주 흔하지만, 당하는 쪽이 되어보면, 그건 정말 경악스러운 거야. 2020. 12. 22.
위대한 개츠비 - Francis Scott Key Fitzgerald 이렇게 내가 관대한 것처럼 자랑했지만 나는 이런 관대함에도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인간의 행동이란 단단한 바위 덩어리나 축축한 습지에 근거를 둘 수도 있지만, 나는 일정한 단계가 지난 뒤에는 그 행위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지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지난해 가을 동부에서 돌아왔을 때, 나는 이 세계가 제복을 차려입고 있기를, 말하자면 영원히 '도덕적인 차렷' 자세를 취하고 있기를 바랐다. 나는 이제 더 이상 특권을 지닌 시선으로 인간의 내면세계를 오만하게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오직 이 책에 이름을 제공해 준 개츠비만이 내가 이러한 식으로 반응하지 않은 예외적인 인물이었다. 내가 드러내 놓고 경멸해 마지않는 것을 모두 대변하는 개츠비 말이다. 그러나 만약 인간의 개성이.. 2020. 12. 11.
별 헤는 밤 - 윤동주憧憬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憧憬)과 별 하나에 시(詩)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소녀(異國少女)드ㅏㄹ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잼,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 2020. 12. 11.
승무 - 조지훈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깍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 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2020. 12. 11.
버블리온 - 문지혁 하나의 책은 하나의 세계에요. 당대의 정치, 경제, 테크놀러지, 이념, 유행, 미적 취향이 모두 집약된 시대의 거울이죠. 동시에 그 거울들은 개별적이고 독립된 우주이기도 해요. 각자로 존재할 권리. 하나로 모아지지 않을 권리. 그게 좋은 내용이든 나쁜 내용이든, 튼튼한 실로 묶여 있든 접착제로 대강 발라져 있든, 표지가 색이 바랬든 낱장이 떨어졌든 간에, 한 권의 책처럼 살아남는 것. 비록 잊혀지고 버려져 책장 한구석에 처박혀 있을지라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한 권의 책이 되는 것. 2020. 12. 11.
지하에서 쓴 수기 - Фёдор Миха́йлович Достое́вский 쾌감에서 얻는 그 미묘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신경이 둔한 사람에 관해 차분히 얘기해보자. 이런 사람은 어떤 때는 황소처럼 무지막지하게 돌진해서 대단하다는 명성을 얻을 때도ㅛ 있지만, 내가 이미 말했듯, 불가능의 벽에 부딪히면 곧바로 굴복한다. 그 벽이 돌벽을 의미할까? 그렇다면 어떤 돌벽일까? 그 돌벽이란 당연히 자연법칙, 자연과학의 결론, 수학을 일컫는다. 예를 들어, 인간이 원숭이에게서 진화되었다는 설이 증명된다면, 우리는 눈살을 찌푸려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우리는 증명된 바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 피 한방울이 자기와 유사한 자들의 피 십만 방울보다 귀중하다는 결론에 의거해, 소위 선행이나 의무가 무엇인지, 헛소리나 편견이 무엇인지 증명해낸다면, 그것을 있는 그대로 수용해야만 한다.. 2020. 12. 7.
노인과 바다 - Ernest Miller Hemingway 노인은 주저없이 그렇게 했다. 어두운데서 이런 일을 하기란 결코 쉽지가 않았다. 한 번은 고기가 푸득거리는 통에 얼굴을 처박고 넘어졌는데, 그만 눈 아래가 찢기고 말았다. 피가 조금 뺨을 타고 흘렀다. 그러나 피는 턱까지 내려오기도 전에 응고되고 말았다. 노인은 이물 쪽으로 돌아가서 뱃전에 기대어 쉬었다. 노인은 부대를 잘 조정하면서 낚싯줄을 조심스레 옮겼다. 지금까지 걸치고 있던 어깨 부위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메고는 그 자리에다 다시 줄을 고정시켰다. 고기가 끄는 힘을 조심스레 감지해 보며 손을 물에 담가서 배의 속력을 알아 보기도 했다. 고기가 무엇 때문에 갑자기 요동을 쳤을까 하고 노인은 생각해 보았다. 틀림없이 낚싯줄이 그 커다란 잔등 위를 스쳤을 거야.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녀석의 등이 내 등.. 2020. 12. 7.
목요일엔 떡볶이를 - 문이소 할머니가 인생의 매운맛 좀 봐라― 하면, 나는 맛은 보이지 않습니다만― 하고 대답해야지. 매운 치즈 떡볶이를 만드는 법을 검색하다가 그만 두었다. 나는 틀릴 줄 알아야 하니까, 용감하게 틀릴 자유를 누리기로 했다. 2020. 12. 7.
두 도시 이야기 - Charles John Huffam Dickens 이런 점에서 은행은 국가와 아주 비슷했다. 영국에서는 오랫동안 반대가 극심해서 오히려 더욱 존중받아 온 법률이나 관습을 개선하자고 제안하는 아들의 상속권을 박탈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2020. 12. 7.
레디메이드 인생 - 채만식 "무얼 먹고 헌신적으로 그런 사업을 합니까……? 먹을 것이 있어서 그런 농촌사업이라도 할 신세라면 이렇게 취직을 못 해서 애를 쓰겠습니까?" "허! 그게 안 된 생각이야……자기가 먹고 살 재산이 있으면서 사회를 위해서 일도 아니하고 번들번들 논다는 것은 그것은 타락된 생각이야." P는 K사장이 억담을 내세우는 것을 보고 속으로 싱그레니 웃었다. "그렇지만 지금 조선 농촌에서는 문맹퇴치니 생활개선이니 합네하고 손끝이 하―얀 대학이나 전문학교 졸업생들이 몰려오는 것을 그다지 반겨하기는커녕 머릿살을 랗을 것입니다……농민이 우매하다든지 문화가 뒤떨어졌다든지 또 생활이 비참한 것의 근본원인이 기역 니은을 모른다든가 생활개선을 할 줄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조선의 지식 청년들이 모두 그런 인도주의자가.. 2020. 12. 4.
지하에서 쓴 수기 - Фёдор Миха́йлович Достое́вский 나의 설명을 들어보라. 쾌감이 찾아오는 시기는, 굴욕적인 자신의 존재를 잔인할 정도로 의식할 때였고, 막다른 벽에 부딪칠 때였고, 앞이 꽉 막혔는데 빠져나갈 탈출구가 딱히 없을 때였고, 탈출구가 없는 상태에서 다른 무엇이 되려야 도저히 될 수 없을 때였고, 무엇이든 다른 것이 되어보겠다는 믿음과 여유가 아직 남아 있다 해도 나 자신이 딴사람이 될 의향이 전혀 없을 때였고, 다른 무엇이 되길 바란다 하더라도 변신할 만한 대상이 실질적으로 전혀 없어서 그냥 두 손 놓고 멍하니 있을 때였다. 그런데 궁극적인 요체는, 강해진 의식의 기본법칙에 따라, 이 법칙에서 파생된 타성에 따라 그 모든 쾌감이 찾아오기 때문에 막상 어떠한 변신도 이루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 2020. 12. 4.
재회 - 정소연 "그건 정말 바보 같은 걱정이었네. 사람을 구할 가회가 그렇게 쉽게 올 줄 알았어?" 2020. 12.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