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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421

목 늘어난 티셔츠가 지저분해 보이지 않는 이유 - 수수진@project158_ 하루 허락되는 쉼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눈을 딱 뜨면 펼쳐지는 하루가 오롯이 내것이라는 사실이 이토록 새롭고 감격스럽다. 다리에 이불을 돌돌 말고 일분 일초를 찬찬히 맛본다. 이렇게 시간이 달았나? 그동안 왜 이 맛을 모르고 살았나. 2020. 12. 4.
상록수 - 심훈 ……영신은 사흘 뒤에 동혁의 답장을 받았다. 제 모양과 같이 뭉툭한 철필 끝으로 꾹꾹 눌러 쓴 글발은 굵다란 획마다 전기가 통해서 꿈틀거리는 듯, 피봉을 뜯는 영신의 손은 가늘게 떨렸다. 주신 글월은 반가이 받었습니다. 그날 저녁에 실례한 것은 이 사람이었소이다. 남자끼리였으면 하룻밤쯤 새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겠지만, 영신 씨의 사정을 보느라고 충분히 이야기할 기회를 놓치고 말었습니다. 나 같은 사람을 그러한 의미 깊은 모임에 청하여 주신 것은 감사하지만, 오는 토요일에는 교우회의 책임 맡은 것이 있어서 올라가지 못하니 미안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 토요일에는 경성운동장에서 '법전'과 축구시합이 있어서 올라가게 되는데, 시합이 끝나면 시간이 늦더라도 백선생 댁으로 가겠으니, 그때 반가이 뵙겠습니다. 하는.. 2020. 12. 3.
대군애(待君哀) - 변영로 아닌 밤중 난데없이 방울이 울어 뉘 타신 수레인지 바퀴소리 나기에 조이고 지은 ㄴ마음 귀에만 모으고서 창틀에 비기어 쭝깃하고 들으렸더니 돌아서 가심인가 딴 길 잡아드심인가 가까워 오던 그 애틋한 소레소리 다시금 멀어지네 멀이저이- 아아 아쉬웁고 애달프다 어느 때나 바람 자고 구름 트이며 그립고 그리운 님의 환한 모습 해나 달 같이 우러를거나 해나 달 같이 모시울거나. 2020. 12. 3.
내 사랑은 빨간 장미꽃 - Robert Burns 오, 내 사랑은 6월에 새로이 피어 난 빨갛고 빠락ㄴ 한 송이 장미꽃. 오, 내사랑은 고운 선율 곡조 맞춰 달콤히 흐르는 가락. 그대 정녕 아름답다, 나의 귀여운 소녀 이토록 깊이 나 너를 사랑하노라. 바닷물이 다 말라 버릴 때까지 한결같이 그대를 사랑하리라. 바닷물이 다 말라 버릴 때까지 바위가 햇볕에 녹아 스러질 때까지 인새의 모래알이 다하는 그 날까지 한결같이 그대를 사랑하리라. 그럼 안녕, 내 하나뿐인 사랑이여 우리 잠시 헤어져 있을 동안! 천리 만리 멀리 떨어져 있다 해도 나는야 다시 돌아 오련다. 2020. 12. 3.
이고 진 저 늙은이 - 정철 이기 진 저 늙은이 짐 풀어 나를 주오 나는 젊었거니 돌이라 무거울까 늙기도 설워라커든 짐을 조차 지실까. 2020. 12. 3.
부활 - Гра́ф Лев Никола́евич Толсто́й 카추샤가 방에 들어오거나 그녀의 하얀 에이프런이 멀리서 보이기만 해도 네플류도프는 모든 것이 햇빛이 내리비추는 것처럼 황홀해 보였고, 모든 일이 전보다도 한층 즐겁고 재미있게 느껴지고 인생 자체가 보다 의미 있고 행복하게 여겨졌다. 그녀도 역시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네플류도프에게 이런 기분을 일으키게 한 것은, 카추샤가 눈앞에 있거나 가까이에 있을 때만이 아니었다. 그저 카추샤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의식만으로도, 또한 그녀 역시 네플류도프가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만 해도, 두사람은 행복했다. 네플류도프는 어머니로부터 불쾌한 편지를 받거나, 논문이 잘 되지 않거나, 또한 청년에게 흔히 있는 이유 없는 우수를 느끼거나 할 때에도 그저 카추샤가 가까이에 있고 언제든지 그녀를 볼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2020. 12. 2.
율정의 이별 - 정약용 주막집 새벽녘 등불은 꺼질 듯한데 하늘의 샛별조차 이별을 서글러한다 설움에 겨워서 말을 못하고 치솟는 슬픔에 목이 메인다 흑산도는 바다 가운데 있는데 그대가 어째서 들어가려는가 고래는 이빨이 산과 같아서 배를 삼켰다가 다시금 뱉아 낸다 지네 같은 배는 쥐엄나무 껒질 같고 살무사의 누른 빛은 등나무 넝쿨 같다 내가 강가에서 귀양살이 할 때는 밤마다 강진의 형님을 생각했다 푸른 바다를 두고 흩어져 그리워하면 보고픈 형님이 물위에 떠올랐다 내 몸은 솟아올라 큰 나무로 옮아가니 좋은 구슬이 캄캄한 상자를 벗어난 듯하다 또 미련하고 어리석은 아이처럼 공중에 내지른 무지개 잡으려 한다 서쪽 언덕에 활 같은 땅뙈기 아침 구름 걷히면 더욱 또렷하다 아이가 무지개를 쫒아가면 멀어만 가듯 잡힐 듯한 흑산도는 서쪽으로만 달.. 2020. 12. 2.
춘량 - 김영랑 큰 칼 쓰고 옥(獄)에 든 춘향이는 제 마음이 그리도 독했던가 놀래었다 성문이 부서져도 이 악물고 사또를 노려보던 교만한 눈 그 옛날 성학사(成學士) 박팽년(朴彭年)이 오불지짐에도 태연하였음을 알았었니라 오! 일편 단심(一片丹心) 원통코 독한 마음 잠과 꿈을 이웠으랴 옥방(獄房) 첫날밤은 길고도 무서워라 서름이 사무치고 지쳐 쓰러지면 남강(南江)의 외론 혼(魂)은 불리어 나왔느니 논개(論介)! 어린 춘향을 꼭 안아 밤새워 마음과 살을 어루만지다 오! 일편 단심(一片丹心) 사랑이 무엇이기 정절(貞節)이 무엇이기 그 때문에 꽃의 춘향 그만 옥사(獄死)한단말가 지네 구렁이 같은 변학도(卞學徒)의 흉칙한 얼굴에 까무러쳐도 어린 가슴 달큼히 지켜주는 도련님 생각 오! 일편 단심(一片丹心) 상하고 멍든 자리 마디마.. 2020. 12. 2.
달과 6펜스 - William Somerset Maugham 그때만 해도 나는 인간의 천성이 얼마나 모순투성이인지를 몰랐다. 성실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가식이 있으며, 고결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비열함이 있고, 불량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선량함이 있는지를 몰랐다. 2020. 12. 2.
신이여, 저를 미치지 않게 하소서 - Александр Сергеевич Пушкин 신이여, 저를 미치지 않게 하소서. 아니, 그보다는 차라리 보따리와 지팡이가 나아요 아니, 고생스럽고 배고픈 게 차라리 더 나아요., 그것은 내가 나의 이성을 존중해서도 아니고 이성과 헤어지는 것이 기쁘지 않아서가 아니요. 나 자유로이 둔다면 그 얼마나 활개 치며 아두운 숲으로 달려가리! 열병에 걸린 것처럼 노래를 부르고, 또 부르고 그 얼마나 자유로이 멋진 꿈에 도취되어 나를 잊으리. 그리고 나의 파도소리에 귀 기울이고 행복에 가득차서 빈 하늘을 바라보리니 나 그 얼마나 힘차고 자유로우리 들판을 파헤치고 숲을 휘어뜨리는 회오리처럼. 그런데 불행히도: 미친다는 것은 페스트보다 더 두려운 일, 곧 갇히고 사슬에 묶이리니, 사람들은 창살 사이로 짐승을 찌르듯 찌르러 올 것이고, 그리고 밤에는 들을 것이다. .. 2020. 12. 1.
영원의 미소 - 심훈 신문사에서 시방 호외를 낸다구 야단법석일세, 벌써 여관을 떠 넘겼는데 배달이 몇이나 모였어야지. 자네가 이리루 떠나온 걸 아는 사람이 없기에 내가 통지를 하러 왔네. 호외? 호외는 또 무슨 호왼구. 아마 OO사건이 풀렸나보데. 그 말을 듣자 수영의 양미간에는 금시 내 천(川)자가 씌어졌다. OO사건이란 바로 자기 자신이 관계했던 사건이기 때문이다. 추운데 미안허이. 곧 나감세. 수영은 문을 닫고 앉으며 남폿불을 돋우었다. 허우대ㅑ가 크지는 못하나 중키는 확실하고 어깨가 벌고 가슴이 봉긋이 내어민 폼이 책상물림 같지는 않다. 콧날이 서서 성미가 좀 까다로울상 싶으나 눈이 크고 어글어글해서 성격의 조화(調和)를 시킨다. 입술은 좀 두툼한 편인데 인중이 길어서 한번 입을 다물면 좀체로 말이 샐 것 같지 않다... 2020. 12. 1.
고요한 미래 - 임현 이것저것 비용을 따져볼때 제법 괜찮은 조건이었으므로 이정도의 불편은 마냥 참고 견뎌야 하는 거라고 암묵적으로 합의된 일일지도 몰랐다. 그것도 아니라면 애당초 이유가 전혀 다른 문제일 수도 있었다. 단순히 타이밍이 기가 막히게 들어맞았을 뿐, 원인은 전혀 다른 데 있었은데 그것도 모르고 괜히 바뀐 환경만을 탓했던 게 아닐까. 2020. 12. 1.
일의 기술 - Jeff Goins 자기 일에 훌륭해지려면 연습이 필요하다. 단 아무 연습이나 다 되는 게 아니라 고통이 따르는 연습, 자신을 넓히고 키우는 연습이어야 한다. 에릭슨이 "주도면밀하다"고 표현한 이런 연습은 극히 어려워 차라리 "고통스럽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 소요 기간은 약 10년 또는 1만 시간으로 우연히도 도제의 편균 기간과 일치한다. 하지만 이것은 연습의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1만 시간을 채운다고 곱다로 전문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2020. 12. 1.
밤 같은 밤 - 박지용 함께 누울 때면 우리는 죽은 듯 잠이 들었다 서로가 서로를 옷걸이처럼 걸치고 입은 지 오래된 장 속의 옷같이 서로의 습기를 가득 머금고 잠이 들었다 날이 밝으면 그게 우리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던 우리는 함께 누운 밤이면 온 생의 무게로 서로를 덮고 오늘의 우리는 다시없다고 천장에 야광별을 하나씩 붙였다 이러다 눈이 부셔 잠들 수 없는 날이 오면 어떡하지 같은 종류의 첫눈 같은 말을 하고 싶었던 우리는 야광별이 낮에도 빛났으면 좋겠어 같은 실없는 말을 하며 잠이 들었다 밤 같은 밤들이었다 이제 더는 죽은 듯 잠들지 못하는 밤 위로 다시 오지 않을 낮들의 빛이 영원처럼 반짝였다 한낮에도 별이 가득한 하늘을 보았어 그런 꿈을 꾸었어 낮에도 밤에도 눈이 부셨어 그런 꿈을 꾸었어 다시 함께 잠드는.. 2020. 11. 24.
원고료 이백원 - 강경애 K야 나는 아직도 잘 기억한다. 내가 학교 일년급 때 일이다. 내일처럼 학기시험을 치겠는데도 종이 붓이 없구나. 그래서 생각다 못해서 나는 옆의 동무의 것을 훔치었다가 선생님한테 얼마나 꾸지람을 받았겠니. 그러구 애들한테서는 애! 도적년 도적년 하는 놀림을 얼마나 받았겠니. 더구나 선생님은 그 큰 눈을 부라리면서 놀시간에도 나가 놀지 못하게 하고 벌을 세우지 않겠니. 나는 두 손을 벌리고 유리창 곁에 우두커니 서 잇었구나. 동무들은 운동장에서 눈사람을 맨들어 놓고 손뼉을 치며 좋아하지 않겠니. 나는 벌을 서면서도 눈사람의 그 입과 눈이 우스워서 킥하고 웃다가 또 울다가 하였다. K야 어려서는 천진하니까 남의 것을 훔칠 생각은 했지만 소위 중학교까지 오게 된 나는 아무리 바쁘더라도 그러한 맘은 먹지 못하였.. 2020. 11. 24.